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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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 시리즈를 마치며> 이어령 본사 고문의 `키워드 풀이`

'디지로그'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친 말이다. '디지로그'는 단편적인 기술용어가 아닌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다.

신년 시리즈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30회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끝낸 본사 이어령 고문을 만났다. 독자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던 미진한 부분들을 알아보는 자리였다. 연재된 글에는 아직 낯선 개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고문은 "신년 덕담을 글로 풀어 쓴 것일 뿐"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새로운 개념과 지식을 추가했다. 그것은 앞으로 책을 통해 정리될 수밖에 없으리라.

 
 중앙일보 이어령 고문
[사진=최정동 기자]
-우선, 연재를 끝내신 소감부터 말씀해 주시지요.

"신년 덕담을 글로 쓴 것뿐인데요. 덕담이란 원래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연히 비판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풀어야 할 과제를, 그리고 과거사가 아니라 앞날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희망의 화두를 내놔야겠지요. 이런 성격에 맞춰 덕담을 하다 보니 복(福)이란 말이 '디지로그'란 용어로 요약된 것이지요."

-디지털이니 아날로그니 하는 말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한데 합친 '디지로그'는 더욱 어렵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럴 겁니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되풀이하면서도 막상 덕(德)이란 말이 무엇인지 복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쓰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디지로그란 말도 복이니 덕이니 하는 말처럼 자꾸 쓰다 보면 장독의 묵은 장맛처럼 몸에 배게 되겠지요."

-벌써 디지로그란 말이 시중에서 많이 퍼져 있는데요. 아직은 첨단기술 제품에 옛날 감성을 담은 상품이라는 마케팅 용어로 주로 쓰이는 듯합니다. 기업체의 큰 연구소나 성인교육기관 같은 데서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요.

"모든 용어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 낮은 의미와 높은 의미를 지니기 마련입니다. 특히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전자공학의 기술용어에서 시작해 일상적인 비유적 표현,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적 개념어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그것을 모두 아우른 포괄적 개념이니 마케팅 용어로 사용해도 나쁠 것 없습니다."

-디지로그처럼 개념이 다르거나 대립된 뜻을 한데 합쳐 쓰는 혼성어들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공부와 놀이는 정반대 현상인데 요즘에는 둘을 합쳐 에듀테인먼트라고 하지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최근 작고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 1968년 미국 뉴욕에서 발표한 설치작품 'TV 부처'. 동양과 서양, 과학기술과 명상의 세계, 인간화된 예술 등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담고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아우르는 디지로그의 이념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런 혼성어를 외국에서는 포트만토 (portmanteau)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연기와 안개는 독립된 말이었지만 공해로 이 두 개가 합쳐지는 현상이 일자 스모그(smoke+fog)란 혼성어가 생겨났어요. 디지털 기술이 처음 나오자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그것만 있으면 아날로그의 기술이나 물질로 못하던 일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처럼 디지털만으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이 성숙해질수록 아날로그의 기술과 감성이 있어야 된다는 의식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후기 정보사회를 향하여'라는 부제를 붙이신 거군요.

"그렇지요. 컴퓨터 인터넷이 생기던 초기 정보화 사회와는 그 환경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선 인터넷의 역기능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각종 전자제품을 비롯해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학.사회.문화 전반에, 심지어 정치 분야에서도 디지털적인 1과 0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틀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좌파도 우파도 없는 새 정치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마는 시카고대 테니 클라크 교수는 20년 동안 20여 개국에서 얻은 구체적인 데이터들을 조사분석한 결과 기존 정치풍토와는 달리 좌파.우파로 가를 수 없는 새 정치의 징후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지요."

 
 ◆디지로그 문화의 상징 '아노토펜'=스웨덴의 아노토사가 개발한 특수펜. 펜촉 옆에 달린 카메라 센서가 종이위의 아날로그 글씨를 인식해 컴퓨터로 전송한다. 24회 '아노토 펜이 붓 문화 살린다' <본지 1월 27일자 3면> .
 
-정치 말고 우리의 피부감각에 직접 와닿는 디지로그 현상으로 전자제품이나 기업 모델을 든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소니가 신개념 컴퓨터로 판매한 바이오(vaio)시리즈입니다. 비주얼과 오디오를 나타내는 앞의 VA자는 아날로그의 파상곡선으로 그려져 있고 끝의 아이오(IO)는 디지털의 1과 0으로 디자인돼 있는 그 로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융합된 세계를 지향하는 소니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즘 '아이 제너레이션'이란 말에 불을 붙인 애플사의 '아이팟'(iPOD) 휴대 음악 플레이어도 넓은 개념으로 보면 디지로그 증후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종래의 워크맨 같은 아날로그적 환경과 인터넷상의 냅스터나 소리바다와 같은 음악 공유 사이트의 디지털 환경을 뛰어넘어 저작권 문제까지도 일거에 해소했으니까요."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거대기업이 애플의 디지로그적 발상에 일격을 당한 거군요. 그런데 방금 디자인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도 디지로그와 관련이 있나요.

"디자인은 디지로그 파워의 핵심이지요. 디지로그 마케팅은 모두 디자인의 의식과 감각에서 나옵니다. 서양의 종은 안에서 쳐서 밖으로 울리도록 되어 있고, 한국(동양)의 범종은 밖에서 쳐서 안에서 울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장식적 차이가 아니라 문화와 종교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간(아날로그)과 컴퓨터(디지털)의 접촉면을 인터페이스라고 하는데 디자인은 바로 인간과 물건 사이를 연결해 주는 인터페이스를 만들어주는 파워입니다. 길이 나쁘면 왕래가 어려워지듯이 쓰기 힘들고 정이 안 붙는 디자인은 사람의 마음을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산업시대의 3D는 모두들 피했지만 오늘의 Digital.DNA.Design의 3D에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디지털은 숫자의 세계이고, 아날로그는 말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융합하는 사고를 하신 거군요.

"사실은 언어도 좌뇌 기능에 속하는 것으로 선과 악, 생과 사 등 디지털적인 대립항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숫자와 비교할 때에는 아날로그를 대표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에서 언어는 문화, 숫자는 문명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으며 '1984년'의 미래소설을 쓴 조지 오웰은 문명의 종말과 인간의 위기를 언어가 숫자로 바뀌는 그 파괴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었지요. 나를 대신하는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각종 자격증과 카드 번호는 모두가 디지털적 세계의 숫자로 돼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죄수처럼 숫자로 호명되는 감옥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하의 감옥에서 한 시인이 자신의 죄수번호 264번을 언어로 컨버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광야'의 시인 이육사(李陸史)의 필명입니다. 386세대를 원래의 숫자적 의미와는 달리 3.1절과 8.15와 6.25를 모르는 세대라고 한다든지, 펜티엄 시대의 386 컴퓨터라고 패러디화하는 것도 일종의 숫자의 언어화입니다. 그리고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9.11 역시 점을 빼면 911로 미국의 구급 비상전화 번호가 됩니다. 이를 뒤집으면 11.9가 되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이 되지요. 언어를 숫자화하는 것이 디지털 문화라면 이육사의 경우처럼 숫자를 언어로 컨버전하는 것이 디지로그 문화의 징후군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노토 펜(그림 참조)이 보급되면 그것으로 직접 원고를 쓰시겠습니까.

"내 생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이브리드 카도, 아노토 펜도 아직은 일찍 찾아온 한 마리 제비일 뿐입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른 세상이라고 해도 컴퓨터가 광대역 고속통신망과 연결되는 데는 반세기 이상 걸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연잎 현상'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연못을 반쯤 덮었던 연잎이 그 연못 전체를 다 덮는 날은 바로 그 다음날이라는 비유이지요. 주전자의 물이 99도가 되어도 끓지 않다가 마지막 1도에서 갑자기 끓는 것과 같아요. 상품도, 비즈니스 모델도, 사회현상도, 정치나 이념도 어떤 임계점에 달하면 눈 깜작할 사이에 연잎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지금은 작은 징후이지만 디지로그 현상도 어느 땐가는 폭발적으로 퍼질 때가 올 것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듣고 싶습니다. 뗏목을 버리라는 말로 시리즈 끝맺음을 하셨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꼭 뒤풀이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요. 이차.삼차까지는 가야(웃음). 종소리도 그냥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나부끼는 옷고름 자락처럼 여운이 깁니다. 뒤풀이 문화의 아날로그 심성이야말로 빡빡한 디지털 문화를 푸는 치료제지요. 그러나 자전거 기술로 비행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6회 참조) 라이트 형제는 그 기술을 버리지 못해 결국은 비행기를 새로 개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버릴 때가 되면 버려야 하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문에 하루하루 바삐 쓰다 보니 출전을 일일이 밝히지 못했고 미처 고치지 못한 오류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듬고 보충해 한 권의 책으로 묶는 것이 제가 뗏목을 버리는 날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미운 사람도 뒷모습을 보면 용서할 수 있지요.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들을 죄악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지상에는 우리보다 잘 사는 사람이 많지만 남의 가슴에 못질하지 않고, 피눈물 흘리지 않게 하고 이만큼 사는 대한민국 같은 나라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우리가 남겨두고 가는 뗏목이 삐걱거린다고 탓하지 말고 두 손으로 불끈 그 키를 잡으세요. 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면 분명 한국인은 디지로그 시대를 앞장서 갈 것입니다."

대담 글=조현욱 문화·스포츠 부문 부에디터 <poemlove@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2.05 19:51 입력 / 2006.04.08 00: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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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엇비슷이라는 한국말을 알면 미래의 세상이 보인다. '엇비슷'의 '엇'은 '엇박자'의 경우처럼 서로 다른 것들의 이질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비슷'은 더 말할 것 없이 엇과 반대로 같은 것의 동질성을 의미한다. 이렇게 다른 것과 같은 것의 대립 개념을 하나로 결합시킨 것이 한국 고유의 '엇비슷'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엇'은 1과 0의 디지털과 같고 '비슷'은 일도양단으로 끊을 수 없는 연속체의 아날로그와 같다. '엇비슷'에서 '엇'만 보는 사람이 디지털인이고 '비슷'만 보는 사람이 아날로그인이다. 양자를 함께 보는 인간만이 디지로그의 미래형 인간이 된다.

디지로그형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시골 아이들에게 "너의 어머니 어디 가셨니?"라고 물어보면 안다. 일본과 중국 애들은 외출했다고 하고, 영어를 하는 아이들은 "쉬 이즈 아웃"(밖에 있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 아이만은 "나들이 가셨어요"라고 할 것이다. 나들이는 '나가다'와 '들어오다'의 대립어를 한데 합쳐놓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어머니의 외출은 '나가면서 동시에 들어오는 행위'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가출이다. '지금' '여기'의 시점에서 벗어나 차원이 다른 눈으로 보면 분명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은 하나다.

단군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이번에는 "곰이 사람이 돼 하늘님 아들과 결혼하는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명쾌한 것을 어른들은 그동안 얼마나 복잡하게 답하려고 했는가. 지상에 있는 곰은 '검'고 하늘의 환웅은 '환'하다. 곰이 동굴의 어둠이며 밤이라면 환웅은 빛이며 대낮이다. 곰은 낮은 땅에서 올라가고 환웅은 높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높고 낮은 것, 열린 것과 닫힌 것, 그리고 빛과 어둠이 결혼한 자리에 엇비슷한 세상 신시가 열린다. 너무 가까운 것끼리는 결혼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둠과 빛 사이에서 단군의 새벽은 탄생한다. 그리고 좁은 동굴과 무한한 하늘이 합쳐 아사달의 공간을 만든다. 그것을 우리 어린 것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 곰이 사람이 되는 이야기다. 곰은 그냥 곰으로 있는 것(being)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되는 생성물(生成物.becoming)이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내가 호수가 되면 호수는 연꽃이 되고 연꽃은 돌이 되고"라는 미당의 시 구절은 영원히 생성되면서 순환하는 단군의 이야기와 같다. 밤이 아침이 되고 아침은 대낮이 되고 대낮은 황혼의 저녁이 되면서 밤이 된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사람을 평가할 때도 '사람이 됐다' '못됐다'고 한다. 한국 음식 역시 '있는 맛'이 아니라 입안에서 '되는 맛'이다. 씹어야만 비로소 싱거운 밥과 짠 김치가 한데 어울려 김치맛이 되고 밥맛이 '된다'. 그러니 누가 김치맛과 밥맛을 따로 분간할 수 있겠는가.

"군(君)다이 신(臣)다이 민(民)다이"라고 노래한 충담사(忠談師)의 안민가 역시 '되다'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다이'란 말은 '답다'로 '되다'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곧 '대통령다워진다'는 말이고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한국인다워진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일을 당하면 "사람 살려"라고 외친다.

일본 사람처럼 그냥 '살려(助けてくれ)'가 아니라, 서양 사람처럼 '나 살려(help me)'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라는 것이니 어디에서나 통하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 지상에는 천만 가지 구호가 있지만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람과 그것을 살리는 생명문제일 것이다. 사람을 살리면 디지로그 시대가 오고, 컴퓨터를 못하는 노인도 더 이상 구박받지 않는 세상이 '된다'. 젊음의 열정은 엔진은 돼도 방향을 잡는 키가 되기는 어렵다. 사이버의 본뜻이 '키잡이'이듯이 배가 좌충우돌할 때 희망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기성세대다.

그러나 강을 다 건넜으면 타고 온 뗏목은 버려야 한다. '되다'는 말 못지않게 버리란 말을 잘 쓰는 한국인이 아닌가. 잊어버리고 놓아버리고 내버리라고 하지 않는가. 무거운 뗏목을 메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혼하는 저 신시(神市)의 땅으로 갈 수 없다. 눈물 나게 배고팠던 이 민족에 경제성장의 기적을 만들어 준 자랑스러운 주역들, 짐승처럼 억압받고 살던 사람들에게 민주화의 빛을 밝힌 용감한 주역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을 버려야 또 하나의 새벽이 온다. 천방지축 달리는 위험한 아이들도 의젓한 어른이 '되어' 이 강가로 올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뗏목을 골라 강을 건널 것이다. 그날을 위해 나도 이제 이 글을 메지 않고 이곳에 버리고 간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디지로그’ 말말말

"디지털 세대들은 실제로 씹는 습관을 잃어가고 있다. 정보시대의 아이들은 클릭 하나로 삶의 문제들을 씹지 않고 삼켜버렸다." <1월 1일자 1회>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악기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기술문명의 방향이요 희망이다." <1월 3일자 3회>

"이 지구상에서 농경-산업-정보 세 문명의 왕자를 동시에 데리고 사는 유일한 공주가 있다면 바로 한국인이 아니겠는가." <1월 4일자 4회>

"만약 우리의 뇌와 그 인지 시스템이 1이나 0 하나만 틀려도 절대 그대로 넘어가지 않는 디지털 언어로 돼 있었더라면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을 절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1월 12일자 11회>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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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함께 나누는 것이 꿈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람이 가장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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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에는 집안식구 전체가 전화 한 대를 놓고 썼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와 골프를 쳤는지 어머니가 누구와 계모임을 했는지 전화를 건네드리다가 자연스럽게 정보를 얻는다. 부모들 역시 아이들이 누구와 사귀고 무엇을 하고 노는지도 안다. 하지만 휴대전화가 생기고부터는 그러한 소통이 어려워진다. 각자가 자기 전화를 쓰고 받기 때문이다. 그것이 '등장 밑이 어두운' 정보시대의 패러독스다. 심한 경우에는 가족을 쪼개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탈리아 최대의 사립탐정 회사 '톰폰지 인베스티게인션스'는 배우자에게 외도가 발각된 사례의 87%가 휴대전화 때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여름 휴가가 끝나는 9~10월에 이혼이 급증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이혼 전문 변호사들에 따르면 이 기간 이혼율이 30%나 급증하는 것은 가족들과 휴가 중에 은밀한 휴대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날리다가 생긴 일이라고 한다.

휴대전화는 사공간(私空間)을 낳고 그것이 공공간(公空間)을 위협한다. 휴대전화를 이용한 수능시험 부정이 대표적인 예다. 지하철 휴대전화가 논란이 되는 것도 흔히 내세우는 소음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하철 소음은 그보다 몇 배나 크기 때문이다. 때로는 휴대전화의 전파가 심장박동조절기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를 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 역시 과장된 주장이다. 진짜 이유는 공공장소를 침범한 사적 공간에 대한 혐오감이다. 일본의 여고생들은 지하철 객차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남학생들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태연하게 앉아 도시락을 먹기도 한다. 한마디로 휴대전화가 생기고부터 애나 어른이나 공공 공간과 사공간을 구별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실제 사회 조사에서도 과거에는 엘리베이터에서 친구와 사담을 나누다가 낯선 사람이 타면 대화를 중단한다는 편이 더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대화를 계속한다는 쪽이 더 많아졌다.

일본만이 아니다. 왕자병.공주병에 걸린 한국의 젊은이나 분청(憤靑)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젊은이도 똑같다. 그 공통점은 오냐오냐하고 기른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도 사회화와 자기 객관화가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어릴 적 죽마를 타고 놀던 아이들은 크면 자연히 헤어지고 새 친구와 만나는 법인데 휴대전화는 한번 단축키에 친구를 입력시키면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계속 교유관계가 지속된다. 그래서 성장해도 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한 증후군을 일본의 한 연구가는 '휴대전화를 든 원숭이'라고 불렀다. 휴대전화의 독특한 사공간 속에 만들어진 집단은 일본 원숭이들의 행태와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휴대전화에 의해 패럴렐 리얼리티(한 사람이 두 개의 다른 공간 속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것) 속에 살게 됐다. 그래서 때로는 휴대전화의 사공간과 사회의 공적 공간이 충돌하거나 단절된다. 공공 공간이나 공론(公論)이라는 것이 날로 사공간에 먹혀 간다. 휴대전화 때문에 아이들의 소통력은 늘었지만 학력은 저하됐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체체라는 젊은 교사가 휴대전화를 이용해 전교 꼴찌의 불량 학급을 최우수반으로 바꿔놓은 기적 같은 사례에서 그 반대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교사는 문자 메시지로 매일같이 학생 하나하나에게 그날 배운 내용들을 퀴즈 문제로 만들어 보내놓고 답신을 받았다. 그냥 숙제를 내면 응하지 않았을 문제 학생들도 일대일의 문자 메시지 사신(私信)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가족 공동체를 붕괴시킨 바로 그 휴대전화의 사공간의 힘을 이용해 교실에 공공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사제 간의 사적 관계를 만들어 간 것이다. 디지로그 파워란 이렇게 휴대전화의 사적 공간과 사회적인 공공 공간을 잘 조화시키고 융합해 제3의 창조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힘인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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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무지개 색깔이 몇 색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앵무새처럼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울 것이다. 조석으로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디지털 신호가 만들어 내는 수천 수만의 색깔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대답한다. 교실 속의 무지갯빛이 일곱 색으로 고착된 것은 순전히 뉴턴의 스펙트럼 실험 때문이다. 그 자신이 실험실 조수에게 "너도 이 빛이 일곱 색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던 것을 보더라도 단지 뉴턴이 자의적으로 그렇게 나눠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훨씬 이전의 대석학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개 색을 네 색으로 보았고, 세네카는 다섯 색, 그리고 마루켓리누스는 여섯 색깔로 구분했다. 또 아프리카의 쇼너어족은 3색, 바자어의 부족은 청색과 황색 두 색으로 나눈다. 놀라운 것은 식물학자들도 모든 꽃 색깔을 분류할 때 바자어족처럼 청색계와 황색계의 둘로 나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1 아니면 0 이라는 양분법적 디지털 사고가 아이들의 색채 개념을 빈약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말 사전에 수록된 색채들은 빨간색만 해도 56가지가 된다고 한다. 대체 어느 나라의 말이 빨갛다와 뻘겋다를 구별하고 발갛다와 벌겋다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불그레와 불그스레가 다르고, 볼그레와 볼그스레가 서로 다른 미묘한 색채의 정감을 나타낸다. 거기에 불그스름과 불그죽죽의 꼬리까지 달라지면 색깔은 걷잡을 수 없이 가지를 친다. 그러나 이렇게 풍부한 색깔문화도 이념화하면 오방색이 된다. 거기에서 음에 속하는 흑백의 무채색까지 빼고 나면 청.홍.황의 삼 태극 빛만 남는다. 그래서 서양의 교통체계가 한국으로 오면 그린(綠)사인이 청색으로 둔갑한다.

'가재는 게 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이념적인 편 가름을 할 때에는 작은 차이는 무시돼 원색 안에 흡수된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초록색 신호를 뻔히 눈으로 보면서도 '청색 신호등'이라고 부른다. 이념은 색맹을 만든다. 그리고 다양한 색채를 죽여 오직 한 색만을 남기려 한다.

금욕적인 청교도였던 포드 1세는 검은색 자동차만을 생산해 왔다. 미국에서 자동차 색깔이 다양해진 것은 GM사에서 시작된 일로 그 뒤 탈이념적 시대에 들어서면서 색깔 옵션은 1700여 개로 늘어났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자동차 색깔은 100색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소비자의 성향으로 흑백이 그 주류를 이룬다. 초등학교에 교육에서도 우리는 열 가지 색(10색상환)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 84가지를 배운다. 그래서 한국색채연구소의 한동수씨는 1000여 색을 도입한 특수 유아교육용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도루묵이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디지로그 사회를 선점하려면 우선 무지개 색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빨주노초파남보를 외우게 할 것이 아니라 그 색채와 색채들 사이에 있는 것들, 아직은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경계 영역의 어렴풋한 빛깔로 눈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미래의 땅 빛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커서 오직 한 색깔의 크레용만으로 그림을 그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왜 크레용 상자에는 자기가 필요로 하지 않은 색깔까지 들어가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는 컴퓨터의 컬러 바와 같은 색채는 아무 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아이들이 만나는 색깔들은 이슬과 향기에 젖어 있는 붉은 꽃송이이거나 바람이 불면 짐승처럼 웅성거리는 초록색 이파리들이거나 혹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의 빛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성서의 이 한마디 말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생선을 달라는 아이에게 누가 뱀을 주겠는가." 하물며 아이들이 달라고도 하지 않은 뱀을 그것도 독 있는 뱀을 던져 주어서야 되겠는가.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2.01 20:3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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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의 남구만(南九萬)이 쓴 옛시조는 농경사회의 시간의식을 잘 보여준다. 동창이 시각의 시간이라면 노고지리는 청각의 시간이다. 같은 자연시(自然時)라도 청각적인 시간의 연속성이 훨씬 더 아날로그적이다. 그러나 그 시조가 산업시대로 오면 '학교 종이 땡땡땡'의 동요로 바뀐다. '소 치는 아이'를 '초등학교 학생'으로 바꾸고, '밭갈이'를 교과서의 '글 갈이'로, 시간을 걱정하는 '할아버지'를 '어머니'로 대입하면 완벽한 문명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노고지리'와 '학교 종'은 아날로그적 시간과 디지털적 시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노고지리 소리를 듣고 어서 일어나 밭을 갈라는 말과 학교 종소리를 들으며 어서 모이자는 것은 그 의미도, 심리적 강도도 다르다. 노고지리의 시간은 '세월은 유수 같다'는 전통적 표현처럼 물처럼 흐르는 자연시(自然時)다. 확실한 경계선을 표시할 수 없는 '무수치(無數値)'로 표현되는 시간이다. 소 치는 아이는 조금 늦장을 부려도 별 지장이 없다. 혼자 하는 밭갈이는 얼마든지 시간을 자신에게 맞춰서 일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종은 사정이 다르다. 이미 '땡땡땡'이란 말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그것은 이산적(離散的)인 단위의 수치로 표현되는 기계시(機械時)다. 급행열차의 시간표처럼 분초 단위로 금을 긋기 때문에 잘못하면 일 초 차이로 교문이 닫히고 지각생이 될 수도 있다. '어서 모이자'라는 말 역시 시간은 한날, 한시, 한곳에 모이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야 공부도 하고 일도 한다.

무엇을 배우느냐보다도 어떻게 모이는가를 가르쳐 주는 곳이 학교다. 한번 외우면 그만인 구구단과 달라서 학교를 모두 마친 뒤에도 '학교 종'은 '회사 종'이 되고, '회사 종'은 '사회 종'이 된다.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그 선생님은 새벽 교회당에도 있고, 공장 문에도 있고, 모든 역 모든 거리의 문 앞에도 있다. "얘야, 학교 늦을라"의 어머니 소리는 어렸을 때 듣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밤 12시, 자정에서 일 초만 넘겨도 마법의 마차는 호박이 되고 백마는 쥐가 되고 신데렐라의 옷은 누더기로 변할 것이다. 요술쟁이 노파가 힘을 쓰는 그 옛날에 대체 무슨 놈의 시계가 그것도 분초를 따지는 정확한 시계가 있었다고 신데렐라는 허둥지둥 나오다가 유리구두까지 벗겨져야 했는가. 모든 것을 양자화(量子化)하는 디지털 시계처럼 유리구두 역시 한 치의 에누리도 없이 투명하다. 그러고 보면 신데렐라의 판타지는 컨베이어 벨트의 작업라인에서 시간에 쫓기며 일하는 여성 근로자의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아날로그의 시간이 디지털 시간으로 바뀌어 간다는 것은 개인 노동에서 집단 노동으로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시간에 먹고 기도하고 잠자야 하는 수도원의 생활에서 기계 시계가 처음 발명됐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듣는 교회당 시계탑이 괘종시계가 되어 가정 안으로 들어오고 그것이 탁상시계가 되어 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회중시계로 작아지면서 개인의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온다. 이윽고 오늘날 같은 팔목시계가 되면 사회의 노동과 생활양식도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진다.

컴퓨터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집단이 함께 모여 작업하는 대형 메인프레임은 회사의 워크스테이션으로 변하고 그것이 데스크톱 PC가 되면서 집으로 들어온다. 다시 노트북 컴퓨터가 작아지면서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모바일, PDA로 줄어든다. 거기에서 다시 휴대전화 세상이 되면 아예 내 손목시계는 사라지고 만다. 사회도 함께 변해서 출근시간도 개인에 따라서 제가끔 달라지는 플렉스 타임이 적용되고 시차근무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주5일제가 되어 아침에는 때때로 노고지리 우짖는 시간이 온다.

정말 그렇다. 노고지리도 학교 종도 아니다. 디지로그의 시간은 백마를 탄 왕자의 말발굽 소리처럼 온다. '빨리빨리'의 디지털사회는 업그레이드돼 오직 한 사람의 발에만 맞는 외짝 유리구두가 주인을 찾아오는 '온리 원'의 시대가 온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 바로잡습니다

2월 1일자 3면 '내 손목시계 어디로 갔나 디지털 사회 업그레이드'제하의 기사 중 빠진 글자가 있었습니다. 본문 "확실한 경계선을 표시할 수 없는'무수(無數値)'로 표현되는 시간이다"중 '무수'는 '무수치'가 맞습니다.


2006.01.31 19:30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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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아날로그 자연환경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온라인 게임으로 약시자가 늘고 MP3 플레이어로 난청자가 분다. 수능시험장에는 안경은 기본이고 약시자를 위한 모니터가 따로 설치됐다. 그리고 6세에서 19세 미만의 미국 청소년들 가운데 12.5%가 소음성 난청 증상자라고 한다.

디지털 쓰나미에 대해 속수무책인 것처럼 현대인은 얼마 전 남아시아의 자연 쓰나미에 대해서도 약했다. 푸껫과 몰디브 같은 관광지에서는 수천 명이 참변을 당했지만 안다만.니코바르 군도(群島)의 옹게족 114명 전원은 모두가 고지대로 피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스리랑카 얄라 국립공원의 코끼리.멧돼지.원숭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배가 난파하기 전에 쥐들이 먼저 달아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상식이다.

쥐 이야기가 나왔으니 컴퓨터의 마우스는 어떤가. 매초 1800만 개의 명령을 실행한다는 인텔리 마우스라도 여전히 곡식을 축내고 대들보를 긁던 옛날의 쥐들처럼 컴퓨터 사용자들을 괴롭힌다. 더블클릭이 힘든 노인이나 화면을 볼 수 없는 신체 장애인들에게는 오히려 손으로 더듬어 칠 수 있는 키보드가 더 고맙다. 미셸 세르가 '파라지드'에서 한 말처럼 역사상 인간은 쥐를 이겨본 적이 없다. 그것을 이기려면 디지털 기술을 한 단계 높여 인간과 기계를 일체화하는 바이오닉스와 손을 잡아야 한다.

아니다. 벌써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 로지텍사는 바로 지난 9일, 미국 이머전사가 개발한 '햅틱스'(그리스어로 손으로 잡는다의 haptikos에서 온 말) 기술을 채택해 촉감으로 조작하는 마우스를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스크린 위의 포인터가 그 감촉을 마우스에 전달해 웹페이지나 소프트웨어와 물리적인 쌍방향 소통을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사실 지금까지 편리한 그래픽 프로그램을 놔두고 종이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려 컴퓨터에 올리는 '아날로그 동맹자'가 많았다. 그림을 그릴 때 미묘한 손 감각의 터치를 느낄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 감촉 마우스를 사용하면 삼차원의 화상을 묘화하는 데 있어서도 물체의 등고선, 표면의 질감, 그리고 테두리에 닿는 아날로그적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심지어 작은 파일과 큰 파일을 드래그할 때에도 그 무게의 차이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터넷 쇼핑에서 이용하면 물건을 손으로 만져보고 살 수가 있다.

이 마우스의 혁명은 인간과 기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일체화를 상징한다. 한마디로 인간이 기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인간의 생체조직에 맞추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공부품을 인체조직의 근육, 골격, 신경계와 일체화시킨 바이오 하이브리드의 의지(義肢)가 생겨나고 초소형 카메라를 단 바이오닉 아이(義眼), 그리고 뼈를 통해 소리가 전달되는 휴대전화 등이 생겨나 디지털 쓰나미를 예방한다.

그래서 휴스턴대에 가면 동물원이 아닌데 우스꽝스럽게 걷고 있는 펭귄 새들을 볼 수가 있다. 걸음이 부자유스러운 노인이나 뇌졸중 환자들을 위해 펭귄의 독특한 보행 속에 숨겨진 비밀을 캐내려고 연구가 진행 중이다. 입는 컴퓨터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벌써 일본의 쓰쿠바대에서는 입기만 하면 '6백만 불의 사나이'처럼 인체 기능이 증폭되는 HAL이란 기기가 등장했다. 모두가 고령사회에 대비하려는 준비다.

수천 년 동안 인간에게 페스트를 옮기고 불면의 밤을 주었던 쥐가 디즈니의 미키마우스가 되고 포케몬의 피카추가 되고 또 컴퓨터의 마우스에서 DNA의 특허 생물체 '하버드 마우스'에 이르는 진화를 했다. 이제 디지로그 시대가 오면 문명의 수챗구멍에서 나온 그 음산한 쥐들이 바이오닉스의 웰빙 쥐가 돼 모처럼 인간들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할는지 모른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30 19:1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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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길을 가는데 어린아이가 쫓아와 물었다. "주무실 때는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빼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한참 생각해 봤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오늘 밤 자 보고 내일 일러 주마. 잠자리에 든 노인은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잤지만 답답한 생각이 들어 꺼내 놓고 잔다. 그러자 이번에는 허전한 생각이 들어 다시 이불 속에 넣는다. 노인은 밤새도록 수염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하고 잠을 잤는지 끝내 아이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했다.

관운장 수염으로도 알려진 이 일화는 외국인이 태극기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제임스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 두 교수가 쓴 경영학 저서('Built to Last')에서 장(章)마다 찍힌 태극 아이콘을 발견했을 때의 그 당황스러운 느낌도 그런 것이다.

두 교수는 '변화냐 안정이냐, 신중이냐 모험이냐, 저 코스트냐 고품질이냐, 가치 존중의 이상주의이냐 이익 추구의 현실주의냐' 라는 여덟 개의 대립 항목을 만들어 100년간 미국 기업들의 행태를 분석.조사해 봤다. 그 결과 그들이 알아낸 것은 100년 동안 지속적으로 번영.발전해 온 기업들은 모두가 태극 모양의 비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or의 억압'에 굴복한 기업은 흥하다가도 금세 소멸해 버리고, 반대로 이것과 저것을 함께 지닌 'and의 능력'을 가진 회사는 100년의 번영을 누렸다.

역설적인 생각을 피하거나 모순되는 힘과 생각을 동시에 추구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A 아니면 B의 택일적 사고에 의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는 '윈-윈'전략처럼 A와 B의 양극을 동시에 추구해 성취한 기업들은 음의 꼬리에 양의 머리가 오고 양의 꼬리에는 음의 머리가 이어져 돌아가는 태극 모양을 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이 두 개의 대립을 하나로 합쳐 그 중간을 취하는 절충이 아니라 모순되는 쌍방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 동시에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태극의 음양과 같은 힘이라고 설명한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해병대는 해군과 육군을 그냥 혼성한 집단이 아니다. 바다냐 육지냐의 택일이 아니라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동시에 싸울 수 있도록 한 양서류(兩棲類) 같은 신개념에서 태어난 유니크한 군대 조직인 것이다. 그래서 경영 마인드에 '태극 무늬를 단 기업(비저너리 컴퍼니)'들은 동서 가릴 것 없이 해병대처럼 강하다.

공자는 너무 옛날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새롭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H 핑가레트도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서양 사람들은 어떤 의무가 서로 충돌할 때 그중 하나를 선택하려 들지만 공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논어'에서 양을 훔친 아버지의 고사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양자론 연구의 공적으로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된 닐스 보어도 자신의 이론을 보여 주기 위해 태극 문장을 단 예복을 입고 식장에 나타났다. 태극 도형 둘레에는 '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라틴어가 적혀 있었다. 대립(對立)하는 것은 상보(相補)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IMF, e-커머스의 버블, 그리고 반기업 정서의 도전들은 한국 기업들의 수염에 대한 질문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or의 억압'을 'and의 능력'으로 바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음양 상보하는 태극 마크를 비전으로 삼는 것-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8 05: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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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전기 모터와 가솔린 엔진을 합쳐 하이브리드 카를 만들어 낸 것처럼 스웨덴에서는 펜으로 쓴 메모장의 내용이 그대로 PC나 휴대전화로 전송되는 아노토(anoto)의 펜이 개발됐다. 물론 종이 위에 잉크로 쓴 아날로그 정보도 펜대에 내장된 A4용지 40장 분량의 메모리에 디지털로 기록 보존된다. 펜촉에 달린 카메라가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무수한 점을 인식한다. 그 특수지의 패턴을 모두 합치면 유라시아 대륙만한 스케치 북이 된다고 하니 SF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현재 노키아 6630/보더폰 702NK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현실 속의 이야기이다.

이 펜의 개발자인 파헤우스 박사는 수학자.물리학자만이 아니라 신경생리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컴퓨터 연구가들이 생물학자들처럼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고 낙지를 기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으로 디지털 회로와 신경 회로가 합쳐지는 디지로그 기술이 늘어갈 것이라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노토 펜의 충격은 엄지족이 아니라도 디지털 환경과 접속할 수 있다는 편의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문화 환경에서 가장 심한 단절을 이루어 온 것이 바로 글씨 쓰기일 것이다.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떤 필기도구를 사용했든 인체와 손으로 쓴 글씨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깊은 연관성이 있었다. 소위 사람마다 다른 필적(筆跡)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걸어다니면 땅위에 발자국이 생기듯이 종이 위에 글씨를 쓰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의 흔적이 찍힌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옛날부터 지문처럼 필적 감정을 통해 범인을 잡는 일이 많았다. 미술사가 르네 위그의 말마따나 용접공이 철판을 절단한 그 선에서도 그 사람 고유의 흔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은행 금고를 턴 파리의 대도를 추적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타자기라 해도 사람의 습관에 따라 카본 테이프를 통해 찍혀 나오는 문자에 강약의 터치가 생겨나지만 발자국 없이 다니는 유령처럼 아무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것이 유일하게도 컴퓨터 액정판 위에 비치는 디지털 문자다. 컴퓨터에서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우리는 개성과 신체성을 상실한 귀신이 되는 셈이다.

이뿐 아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문화적 특성은 분절된 것과 연속체로 붙어 있는 것의 차이에 있다. 서양 문화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것이 한자든 한글이든, 그리고 가나문자든 모두 띄어쓰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삼국 모두 초서처럼 물이 흐르듯 글씨를 붙여서 써내려갔다. 사실은 서양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단어를 붙여 썼던 것을 후에 와서 띄어 쓰는 필기법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좁은 지면에 자세히 논할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서양의 근대문화가 디지털적이고 동양문화가 아날로그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가 붙여 쓰기와 띄어쓰기, 그리고 서양의 펜과 동양의 붓이다.

보통 펜글씨로도 쓸 수 있고 그것이 자동으로 디지털의 문자로 바뀌기도 하는 양서류 같은 아노토 펜 속에서 죽어가던 붓글씨의 재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붓의 발명자로 전해지는 '사기(史記) 열전'의 몽염(蒙恬) 장군이 떠오른다. 융적(戎狄)을 쳐 공을 세우고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 장군이지만 마지막에는 정적에게 밀려 사약을 받고 죽는다. 처음에는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자신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무수히 지맥(地脈)을 끊었던 사실을 깨닫고 그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아노토 펜이 암시하는 미래의 문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몽염이 말한 땅의 지맥이 자연의 연속체를 의미하는 아날로그 문화이고 그것을 끊은 만리장성이 디지털의 불절 문화라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6 20: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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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디지로그 시대의 징후군을 알려면 자동차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인류 최고의 발명이라고 하는 바퀴와 함께 인간의 문명은 태어났고 (그렇다. 이 지상에는 바퀴 달린 짐승이란 없다) 그와 함께 발전해 왔다. 사람의 근력(筋力)으로 끄는 인력거, 말의 축력(畜力)으로 움직이는 마차, 그리고 증기기관의 동력혁명을 거쳐 오늘의 화석연료로 달리는 자동차-그것들은 모두가 그 시대의 의미를 비춰주는 움직이는 거울이다.


그런데 지금 고유가 시대,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는 교토의정서, 석유 자원의 고갈 등 현대 문명사회의 과제 속에서 자동차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석유의 대체연료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러미 리프킨이 예고한 '수소혁명 시대'를 기다릴 것이고, 타조처럼 시속 100㎞로 뛰어도 엔진이 과열하지 않는 무공해차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이오 시대의 미래를 꿈꿀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해 아카데미상 수상식장의 코닥 극장 앞에 스타들이 몰고 온 미래형 자동차는 뜻밖에도 볼품없는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카 프리우스였다. 서양 문명은 1 아니면 0이라는 이진법적 디지털 사고로 진행돼 왔다. 자동차 역시 처음에는 전기냐 가솔린이냐를 놓고 양자 택일의 논쟁을 벌였다. 에디슨은 전기 자동차를 개발 중이었었는데 당시 사원으로 있던 포드가 "전기 자동차는 발전소 부근밖에는 달릴 수 없다"고 지적하자 깨끗이 손을 들었다. 포드는 그때 이미 가솔린 엔진 차의 다량 생산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전기와 가솔린에 대한 지식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폭발성이 강해 등유로 쓰지 못한 가솔린은 류머티즘의 약 이외로는 위험한 무용지물로 인식되던 때였다. 만약 에디슨이 쉽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20세기의 문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자동차의 역사로 비춰 볼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택일에서 벗어나 이것과 저것 (both and)을 아우른 하이브리드 엔진의 발상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라 평할 수 있다. IT 기술이 카 내비게이션이나 엔진 제어장치로만 사용돼온 종래의 메카트로닉스와는 차원이 다르다. 1NZ-FXE형 가솔린 엔진과 1CM형 전기 모터의 병용으로 출발한 THS의 구동 유닛은 앞으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의 기계 기술이 융합된 새 문명을 부를 것이다.

시가지를 저속으로 달릴 때에는 200V 배터리의 전기 엔진으로 주행하고 고속도로나 언덕을 오를 때에는 가솔린 엔진을 사용해 달린다. 감속시에는 운동에너지를 회수해 충전할 수 있는 회생 브레이크가 작동된다. 이 같은 하이브리드 발상으로 배출가스는 75%(일본 기준) 낮아지고 연비는 ℓ당 20~30㎞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와 같은 환경 성능으로 할리우드의 스타들 사이에 프리우스를 몰고 다니는 유행이 생겨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여러 대를 한꺼번에 구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富)의 파워보다 환경의 클린 파워가, 순종(純種)보다 잡종(雜種)의 감각이 프리우스의 이름 그대로 (라틴어로 ~에 앞서다의 뜻) 시대를 앞서가는 조류를 타게 된 것이다.

아직은 많은 문제점과 전체 자동차의 시장점유율이 0.3%에 불과한 프리우스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평범한 기술의 비범한 결합'이라는 하이브리드적 발상법이 바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특성이라는 점. 그리고 서로 다른 시스템을 결합하는 하이브리드 기술은 88번 손이 간다는 도작(稻作)문화권의 정성이 아니면 힘들다는 점이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먼저 개발한 차지만 디지로그 시대를 이끌어갈 한국인에게는 용기를 주는 대목이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5 19: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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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어령 교수님이 기고하신 디지로그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하였습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라고 하면 귀를 막던 젊은이들도 몸짱.얼짱이라고 하면 금시 반색을 할 것이다. 신(身)은 몸이고 가(家)는 집이니 몸집 좋다는 말이나 몸짱이나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수신에서는 몸이 하나인데 젊은이들이 말하는 얼짱과 몸짱은 별개처럼 둘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몸 위에 붙은 수(修)라는 한자말도 쉬운 한자가 아니다. 한정된 지면에서 그것을 풀이하자면 아무래도 로마시대 평민의 반란군을 설득하기 위해 파견됐던 아그리파의 우화를 빌려오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먹고 놀기만 하는 위(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손.입.이빨 같은 신체의 구성원들에 대한 이야기다. 위를 굶겨서 굴복시키려고 그들은 서로 짜고 아무 음식도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를 굶길수록 자신들의 힘도 점점 빠져 쇠약해졌다. 그제야 그들은 위의 기능을 깨닫고 그 뒤부터 '한 몸'이 되어 열심히 일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기계문명은 아그리파의 우화에서처럼 몸이 해체돼 제각기 따로 노는 상태를 초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기계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가 입고 있는 의상 자체가 실은 상체와 하체로 분할된 신체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셸 셰르의 표현대로 하자면 의상은 일종의 신체지도(身體地圖)다. 자연의 대지(大地)를 소유권에 의해 찢어 무수한 경계선으로 분할한 지적도(地籍圖)와도 같다.

인체의 감각도 미디어의 성격에 의해 흩어지고 분할된다. 음악 감상실에 들어가면 눈을 감고, 도서관에 들어가면 귀를 막는다. 시각문화와 청각문화는 판이하게 차별된다. 오늘날의 디지털 기술로 시청각을 통합한 새로운 멀티미디어 문화가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촉각.후각, 그리고 미각의 세계는 배제돼 있다. 그래서 질서 정밀, 그리고 직선적인 것을 추구하는 시각 편중의 환경에서 살아온 현대인들은 후각의 80%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증언이다.

그런데 수(修)는 다스린다, 고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수신이란 반란으로 흩어지고 동강 난 몸들의 구성원을 아그리파의 우화처럼 '위'의 역할로 재통합해 다스리는 것과 같다. 한국말의 신체어가 다른 나라 말과 다른 것은 '머리' '허리' '다리'처럼 인체를 상.중.하로 3분할하고 있으면서도 '리'자 '항렬'로 연결하고 있다. 머리와 손과 발에서 갈라진 것들이 머리카락이요, 손가락이요, 발가락이다. 다른 나라 말과 비교해 보면 우리의 신체어가 얼마나 통합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감각에 있어서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의 대중가요에서처럼 눈과 귀를 나란히 짝 지어 어우르는 경우가 많고 꽃구경을 가도 눈만 아니라 반드시 음식을 함께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어금니 정보 문화(1회 참조)도 그렇다. 꽃구경하는 사람보다 먹는 사람이 더 많은 그 불가사의한 광경은 바로 시각과 미각을 융합하는 공감각의 특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각 역시 유불선 3교에 두루 통한다. 향도(香徒)의 전통만이 아니라 한국의 제사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향화(香火)이고, 그것은 제주(祭酒)를 올리고 제사 음식을 음복하는 미각 문화와 융합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미디어의 역할을 한다.

디지털 기술의 가장 큰 성과는 산업혁명 이후 제각기 흩어진 신체감각을 멀티미디어에 의해 통합시킨 점이다. 그러나 MP3로 압축된 디지털 음악을 유원지의 호러물 효과음으로 쓸 경우 아이들의 공포감이 떨어진다는 보고처럼 디지털 정보의 약점은 여전히 그 신체성을 드러낸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이 시대의 부름 소리는 "몸으로 돌아오라"는 새로운 수신의 '몸집' 문화다. 그래야만 디지털 정보는 시청각 편중에서 어금니로 씹는 통합적인 '위'의 정보 문화로 발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몸짱'문화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디지로그라는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하나로 합친 말입니다. 지금까지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함께 합친 시계를 부분적으로 '디지아나'라고 부르거나 디지털 다이얼로 그의 뜻으로 디지로그란 말을 이따금 사용해 온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편적인 기술 용어에서 벗어나 정보문화의 신개념 키워드로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비트와 아톰, 클릭과 브릭(brick),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등 IT와 함께 대두된 이항 대립체계를 해체해 신개념을 구축하게 될 이 연재는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인터넷의 어두운 면을 극복하고 앞으로 다가올 후기 정보사회의 밝은 미래를 모색하는 비판과 희망의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필자가 만든 키워드나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신바람 문화''신한국인', 서울올림픽 때의 '벽을 넘어서'를 비롯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새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 등이 있습니다.

2006.01.24 20:2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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